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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차 세계 대전후 최초의 잠수함전 -인·파 전쟁 아트732020-12-16 18:2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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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차 세계 대전후 최초의 잠수함전 -인·파 전쟁

 

천안함 사건 1주년이 되어 간다.

 

북한은 이 천인공노할 만행에 음향 어뢰를 사용한 사실이 밝혀졌다. 

[음향 어뢰는 배의 엔진 소음 등을 따라 추적하는 수중의 유도탄형 어뢰를 말한다.]

 

천안함 - 비열한 만행이 발생한지 일년이 되어간다. 2010년 3월 26일 침몰.



세계 해전사에서 음향 어뢰가 사용된 사례가 딱 한 번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의 이야기다.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 때 파키스탄 해군 잠수함이 음향 어뢰로 인도 프리게이트함 한 척을 격침한 해전을 소개한다.

 

원래 인도는 영국 통치 때까지 파키스탄, 인도, 방글라데시로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국가였는데 독립되면서 종교에 따라 인도[힌두교]와 파키스탄[이슬람교]로 분리 되었다.

이슬람교는 공교롭게도 인도 대륙의 동쪽과 서쪽 양쪽에 퍼져있어, 파키스탄은 국토가 동 파키스탄과 서 파키스탄으로 분리된 상태로 독립하였다.

그러나 동서로 분리된 파키스탄은 여러 갈등이 발생했는데, 결국은 동 파키스탄의 독립선언과 서 파키스탄 주민간 무력 충돌의 정치 갈등으로 비화했다.

이에 인도가 개입하면서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하였다. 결과 파키스탄이 패배하고 동 파키스탄은 독립하여 오늘날의 방글라데시가 되었다.

 

1971년 12월 3일부터 12월 16일까지 발생했던 인도·파키스탄 전쟁 동안 양국 사이에 발생했던 해전은 상당한 규모였다.

12월 4일 야간에 인도 해군이 파키스탄 해군에 선공을 가했다. 인도 함대가 파키스탄의 카라치 항을 기습하여 구축함 한 척을 격침시키고 기뢰 제거함 두 척을 대파하고 육상 정유 시설을 파괴하였다. 파키스탄 해군의 전사자만도 720명이나 발생하였다.

 

동 파키스탄의 벵갈만에서도 인도 해군은 항공모함까지 동원하여 파키스탄 해군을 완전히 봉쇄하고 제해권을 확보했다.

파키스탄 해군은 전쟁 전, 정세가 험악해지고 전운이 감돌자 잠수함 한 척에 기뢰를 적재하고인도 해역으로 출동시켰었다.

 

은밀한 임무에 동원된 파키스탄 잠수함은 1944년 미국에서 진수한 텐크급 디아블로 함이었는데,

 

 

카지 함, 1570톤 - 파키스탄 최초의 잠수함.


 

1963년 파키스탄에 양도 되어 그 이름이‘카지’함으로 바뀌었다. 1967 파키스탄은 이 잠수함을 터키로 보내 기뢰 설치 시설을 추가하는 개수를 했다.

서 파키스탄을 떠난 카지는 3,000마일이나 항해해서 벵갈만으로 들어왔다.

 

카지는 벵갈만 인도 동부에 위치한 비샤카파트남 항으로 출입하는 항로에 기뢰를 설치하라는 명을 받았었다. 이 항구는 인도의 해군 기지가 있는 곳이다

 

그러나 이 잠수함은 기뢰를 부설하는 작업을 시작한지 몇 분 만에 초계하던 인도 해군 구축함 라쥐푸트 함에게 폭뢰 공격을 받고 격침당했다. 자파르 무하마드 칸 함장 이하 승무원 92명 전원이 

사망했다.

 

인도 해군의 발표에 의하면 이 잠수함이 동 파키스탄 치타공의 파키스탄 해군 기지와 교신하는 무선을 감청하고 이에 대응 출동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파키스탄은 잠수함 내부의 적재 기뢰 폭발로 침몰했다고 주장한다. 이 설은 중립적인 여러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있다.

[인도는 카지 함을 인양해서 격침 원인을 조사해보자는 몇 외국 단체의 요청을 거절하고 있다.]

 

파키스탄 해군은 잇따른 패배 소식에 맥을 추지 못하며 절망감을 참아야 했다.

 

한고르 함 -프랑스 다프네이급 잠수함, 860톤. 장보고 함보다 작다.


그러나 파키스탄 해군의 최신 잠수함 한고르함은 인도 해군의 프리게이트함 쿠크리를 뇌격해서 격침시키는 개가를 거두어 파키스탄 해군의 우울한 사기를 일신했다.

 

해전은 12월 8일 밤에 발생했다. 파키스탄 해군의 최신예함이었던 한고르함은 1968년 프랑스에서 건조한 프랑스 다프네이급 잠수함이다.

전쟁 1년 전인 1970년에 파키스탄에 인도되었었다. 정세가 험해지자 한고르함은 1971년 11월 21일 파키스탄의 기지에서 출항했다. 주어진 임무는 인도 대륙의 카티와 해안 초계였다.

 

1971년 12월 2일 한고르는 봄베이 항[뭄바이 항] 앞 바다에 잠복 감시하고 있다가 인도 서부 함대의 다수 함정들이 출동하는 것을 탐지했다.

 

이 함대에 인도의 대형 순양함 미소르도 있었다.

인도 함대는 앞서 소개한 파키스탄의 카라치 항을 급습할 목적으로 출동하고 있는 중이었다.

 

함대는 수중에 잠복한 한고르함의 전방을 아주 근접해서 지나갔다.

 

한고르함은 무선 폐쇄를 하고 죽은 듯이 엎드려 있었다. 인도 함대가 통과하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 부상한 한고르함은 인도의 대규모 함대가 출동했다는 정보를 카라치에 보고했다.

보고는 곧 닥쳐올 인도 해군의 파키스탄 카라치 항 기습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였지만 이 중요한 메시지 발신은 인도 해군 통신 정보대에게 감청 당하고 말았다.

 

무선이 파키스탄 해군의 잠수함에서 발신된 것임을 파악한 인도 해군은 다음날인 12월 3일 서부함대 14전단 소속 프리게이트함 두 척을 인근 해역으로 급파했다.

두 프리게이트함들은 쿠크리와 키르판이었다.[쿠타르라는 함도 출동했다는 설도 있다.] 모두 인도 고유의 칼 이름을 딴 함명(艦名)을 가지고 있다.

미국이나 일본같이 대잠 항공 초계 능력이 뛰어난 나라라면 대잠기를 즉각 파견했겠지만 인도 해군은 이런 항공 초계 능력이 턱없이 부족했었다,

 

출동한 두 척의 군함은 며칠간 전파 발신 주변 해역을 수색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했다.

 

한편 12월 9일, 한고르함의 전파 탐색기에는 인도 해군 함정들이 발신하는 무선 신호로 추측되는 여러 개의 전파가 감지되었다.

 

한고르함의 능동 소나 분석 결과, 무선 발신체 두 개는 확실히 인도 해군 전투함에서 발신하는 것임을 알수 있었다.

바로 한고르함을 잡기 위해서 출동했던 쿠크리와 키르판이 서로 주고 받는 무선이었다.

한고르함은 발신 추정 해역을 탐색하기 위해서 북쪽으로 항로를 잡았다. 한고르함의 함장 타스님 중령은 이를 추적해서 발견하면 격침하기로 결심했다.

이 때 목표와의 거리는 6-8마일이었다. 그러나 느리게 수중 항해를 하는 한고르함의 속도보다 적 전투함의 수상 항해 속도가 훨씬 더  빨랐다.

한고르함은 뒤로 처져서 빠르게 앞으로 빠지는 두 함들과 더 이상 접촉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고르함은 적의 항로를 예상하고 앞질러가서 잠복할 위치로 직행하였다. 저녁 7시경이었다.

 

1971년 12월 9일 자정 무렵 적함에 접근한 한고르함은 깊숙이 잠항하였다. 이제부터 접근과 뇌격은 오직 소나만을 이용한 맹목 항해에 의해서 행해 질 것이었다.

두 척의 인도 해군함들이 점점 한고르함에 가까워 옴을 탐지 할 수있었다. 사거리 내에 두 척이 들어오자 40미터의 해저에 있던 한고르함은 선두의 키르판에게 음향 어뢰 한 발을 발사했다.

하지만 손에 땀을 쥐고 기다리던 한고르함 소나 병에게 아무런 폭발음도 들려오지 않았다. 어뢰가 목표를 명중시키지 못했던 것이었다.

 

쿠크리는 영국이 건조한 블랙우드급 프리게이트 함.-1,456톤

사진은 쿠크리와 같은 급의 익스마우스 함. 

 


어뢰가 명중하지 못했지만 키르판은 어뢰가 스쳐 지나갔음을 알아챘다.

키르판의 함장은 자신의 함이 적 잠수함의 공격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자마자 함수를 돌려 최대 속도로 도주해 버렸다. 


키르판은 대피했지만 그 남쪽에 있던 쿠크리는 도주하지 않고 반대로 어뢰가 달려 온 방향을 파악하고 함수를 한고르함을 향하여 역시 최대 전투 속도로 정면 육박해왔다. 

한고르함은 전속력으로 덤비는 쿠크리로 함수를 전환하고 응전에 나섰다. 


발사 제원을 입력하고 조준한 한고르함은 두 번째의 어뢰를 발사했다. 한고르함 소나 병의 이어폰에 음향 어뢰가 달리는 소음과 이어서 엄청난 폭발음이 잡혔다. 쿠크리에게 명중한 

것이다.


폭발음이 들리기 직전 힌고르함의 소나 병은 쿠크리의 마드라 나태뮤라 함장이 즉시 어뢰 회피 기동을 명령하는 것을 감지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늦었다.


간발의 차이로 음향 어뢰는 쿠크리의 엔진 소리를 쫓아와 폭발했다. 한고르함은 전투후 부상해서 생존자를 찾았지만 아무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음향 어뢰에 명중한 쿠크리는 단 2분 만에침몰하고 18명의 장교를 포함한 176명의 전 승무원이 침몰하는 함과 함께 운명을 같이했다. 인도 구지라트 주 디우 해안 앞 바다에서의 해전이었다.



뇌격 순간의 긴장한 한고르함 내부 그림.

중앙에 서 있는 사람이 타스님 함장. 나중에 쓰리 스타 제독으로 진급했다.




일설에 의하면 함장이 구명 조끼를 부하 장교에게 건네주고 침몰하는 함과 함께 운명을 같이 했다고 하는데 이 말은 신빙성이 없다.[생존자가 한 명도 없었는데 누가 목격하고 이런 소리를 했는지 궁금하다.]


한고르함의 첫 뇌격에 놀라서 도주하던 키르판은 동료함이 침몰되는 것을 보고 크게 분격해서 다시 되돌아와 급하게 폭뢰 공격을 가했다.


키르판은 이 폭뢰 공격에 한고르함이 격침되던가 또는 최소한 위협을 느껴 철수하기를 기대했지만, 한고르함은 피하지 않고 기회를 엿보다가 폭뢰를 뿌리는 키르판의 함미에 음향 어뢰를 한 발 더 쏘았다.


한고르함이 발사한 세 번째 음향 어뢰였다.


키르판은 한고르함이 어뢰를 발사하자마자 이를 발견하고 빠른 회피 기동과 함께 다시 최고 속력으로 도주하였다.


한고르함도 함수를 서쪽으로 돌리고 더 깊은 바다 속으로 잠항해서 다시 있을지 모르는 키르판의 역습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키르판은 그대로 철수하고 말았다.

 

한고르함은 나흘간 그 해역을 어슬렁거리며 추가 먹잇감을 찾았으나 인도 해군은 잠수함 출몰 해역으로 다시 출동하지 않았다. 한고르함은 12월 13일 서 파키스탄 해군기지로 귀항하였다.


인도·파키스탄 전쟁은 12월 16일 인도의 승리로 종식되었고 동 파키스탄에서는 라만 수상을 수반으로한 방글라데시 정부가 수립되어 방글라데시 국의 탄생을 선포하였다.


한고르함은 파키스탄 해군에서 30년 이상을 활동하다가 2006년에 퇴역하였다.


천안함 사건을 바탕으로 음향 어뢰가 사용되었던 인도 해군과 파키스탄 해군의 해전 상황을 살펴보면 두 가지의 특성에 눈길이 간다.


첫째는 음향 어뢰의 명중률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사실이다. 세 발 쏘아서 한 발이 명중했는데 유도 무기의 명중률로는 아무래도 시원치 않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어뢰가 사용된 해전은 두 번 있었다.


첫 번이 인도·파키스탄 전쟁이고 다음이 1982년의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전쟁이다.


포클랜드 전쟁에서 1982년 5월 2일 영국 핵잠수함 콘쿼러함이 아르헨티나 순양함 벨그라노함을 격침했다.



영국 핵잠 콘쿼러 함-4,000톤급 대형함.




영국 잠수함은 유도 장치가 없는 재래식 어뢰 세 발을 발사해서 그중 두 발을 명중시켰다.


함장 크리스 레포드 브라운 중령은 장비했던 음향 어뢰를 사용하지 않았던 이유로 그 신뢰성에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었다.


40년의 세월이 지나 정밀 공업이 별로 발달하지도 못한 북한의 음향 어뢰가 천안함을 명중했는데, 그 간 세계적으로 음향 어뢰 제작 기술이 크게 발전하였고 북한도 이 방면에 기술을 

상당히 축적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하다.


두 번째는 통신 보안의 문제이다. 인도·파키스탄 해전이 의미하는 또 다른 것은 전쟁 중의 해군 함정들의 통신 보안 문제이다.



격침되는 아르헨티나 순양함 벨그라노[9,575톤].323명 사망



앞에서 소개했다시피 양쪽 해군은 상대방 함정의 무선을 감청해서 정보를 얻고 이에 대응하는 작전을 전개했었다.


인도·파키스탄의 잠수함 해전사가 주는 또다른 중요한 교훈은 해전에서 무선 통신 보안의 중요성이라 하겠다.


출처: https://mnd-nara.tistory.com/133?category=332956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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