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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비사(秘史)-소.일 잠수함 해전 아트732020-12-11 20:4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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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비사(秘史) - 소.일 잠수함 해전


 
소련과 일본은 1905년 쓰시마 근해에서 큰 해전을 치른 뒤 수 십 년 동안 바다에서 크게 격돌한 일은없었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기까지 소련과 일본은 동해에서 서로 경계하는 불편한 대치 상태를 유지했지만 실제로 전투를 한 일은 없었다.
 
그런데 태평양 전쟁이 터지고 그 다음해 일본의 잠수함이 소련 잠수함을 뇌격해서 격침시킨 작은 소.일 해전이 발생했다.
 
그런데 이 해전은 이런 격돌이 발생했을법한 동해가 아니라 태평양을 가로 질러 머나먼 미국 서해안 해역에서 발생했었다는 점이 특색이다. 그리고 두 격돌 상대는 서로 상대가 누군지를 몰랐다는 것도 또 다른 특색이다.
 
가격자인 일본 해군은 자신들이 뇌격한 것이 미국 잠수함이라고 단정했었고, 피격자인 소련 해군 역시 가격자로 미 해군을 의심했었다.
 
미 근해에서 소련 잠수함을 뇌격한 일본 잠수함은 해전사에 상당히 유명한 존재로 기록되어 내려온다. 이 잠수함은 I-25잠수함으로은 정찰기를 탑재한 특수 목적의 잠수함이다. I-25잠수함은 2,344톤의 크기에 6문의 어뢰 발사관과 140mm 함포를 장비하고 있다.
 



I-25 수상기 탑재 잠수함


잠수함 사령탑 앞에 작은 격납고가 있어서 여기에 날개를 분해한 정찰기를 싣고 항해하다가 목적지 부근 해상에서 날개를 다시 결합하여 출격시킨다.

미군들이 그렌[glen]이라고 부르는 이 복좌 수상 정찰기에는 푸로트[float]가 붙어 있어서 해상에서 이착륙을 할 수가 있다.

일본의 제식 명칭은 영(zero)식 소형 수상 정찰기이며 340 마력의 엔진을 가진 소형기로서 880 킬로 미터를 비행할 수가 있다.



영식 소형 수상 정찰기 - 아이치 사 제작


일본 잠수함 I-25에서 발진한 정찰기가 미 본토를 최초로 폭격했었고, 잠수함도 함포로 미 본토를 최초로 직접 포격했었다. 함장은 다카미 메이지 중좌였는데 부하들에게도 상당한 존경을 받는 유능한 함장이었다.

정찰기 조종사는 후지다 노부오 준위였다. 1932년 해군에  입대하여 1933년 조종사가 된 그는 일본 해군 항공대의 고참 조종사였다. 

그의 이름이 진주만 기습 항공대장 후지다 미쓰오 중좌와 비슷해서 두 사람을 혼동하는 미국 관련 서적을 본 일이 있다. 그는 나중에 최초 미 본토 폭격에 대한 책을 써서 상당한 유명 인물이 되었다.



후지다 노부오 준위


그의 잠수함 I-25는 일본 해군의 진주만 기습 때부터 출동해서 전쟁 초기 남태평양을 가로 지르며 내내 정찰 활동을 했다.
 
1942년 2월 17일 시드니 항 정찰을 시작으로 호주의 멜번 항, 호바트 항의 상공을 유유히 나르며 사진을 촬영 했다. I-25는 활동을 계속해서 3월 8일에는 뉴질랜드의 웰링턴 항을 정찰했으며, 그 후에 더 이동해서 피지 섬의 상공을 정찰 비행했다.
 
남태평양 쪽의 활동을 마치고 요코스카로 귀항한 I-25는 도크 정비 후 다시 출항하여 그 함수를 서쪽으로 향했다.



후지다 준위와 그의 수상 정찰기


1942년 은밀하게 미 서해안에 접근한 I-25는 잠수함 함포로 아스토리아 근처 포트 스티븐스의 해안포대를 포격하였다. 그해 9월 I-25는 더 야심찬 작전 계획을 가지고 다시 미 본토로 출항하였다.
 
일본 해군이 원래 잠수함에 항공기를 탑재하는 개념 개발 단계에서 염두에 두었던 제일 큰 목표는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하는 파나마 운하의 폭격과 폐쇄였었다.
 
하지만 미국도 이를 알고 파나마 운하 양 입구에 엄청난 해상 및 공중 대잠 초계 자원을 집중시켜 놓아서 접근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다음 단계로 선택한 임무가 미국 본토 서해안 산림 지대를 폭격해서 큰 산불을 내는 것이었다.
 
1942년 9월 9일 미 서해안 오레곤주에 은밀히 접근한 I-25는 후지다와 오쿠다 쇼지 하사가 탑승한 수상기를 발진시켰다.
 
후지다는 오레곤 주의 에밀리 산 상공에 진입하여 소이 폭탄을 두 발을 투하했다. 한 발은 행방이 불명이 되었지만 한 발은 그럭저럭 작은 산불을 일으켰다. 그러나 전날 비가 온데다가 숲이 습해서 금방 저절로 꺼지고 말았다.
 
9월29일 후지다는 다시 출격해서 케이프 블랑코 부근 산에 폭탄을 투하했으나 이 폭탄들은 산불도 일으키지 못했고 미 당국에도 발견되지 못한 채 미궁 속으로 사라졌다.



영식 소형 수상 정찰기


하여튼 태평양 전쟁 중에 일본군이 저질렀던 여러 멍청한 짓 중의 하나였던 미 본토에 산불내기 임무를 그런대로 완수한 I-25는 미 연안을 따라 초계 항해를 하다가 유조선들인 SS 캄덴과 SS 래리 도흐니들을 발견하고 어뢰로서 격침시켰다.
 
그러나 진짜 먹음직한 먹잇감은 10월11일 발견하였다. I -25잠수함 견시가 종대로 항해하고 있는 두 척의 잠수함을 목격한 것이다.
 
위치는 오레곤 앞바다 800마일 해역이었다.
 
급속 잠항한 I-25는 접근해서 그 중 앞서 가던 한 척에게 어뢰를 발사했다. 두 발의 대형 어뢰에 맞은 선두의 적 잠수함은 격심한 폭발음을 내고 그대로 격침되었다.
 
I-25는 격침 된 잠수함이 당연히 미 해군 소속의 것으로 판단해서 일본의 해군 사령부에도 미 잠수함을 격침하였다고 보고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 잠수함들은 미 해군이 아니라 소련 해군 소속이었다.


 
소련 잠수함을 격침한 순간부터는 소련 측의 기록을 인용해보기로 한다.

이들 잠수함들은 소련 해군의 ‘L'형 잠수함들이었다.
 
당시 전황으로서는 소련 잠수함들이 미국 해안에 나타난다는 것은 상상하기가 힘든 일이지만 두 척의 잠수함은 블라디보스톡 해군 기지에 소속된 7척의 잠수함 중 일부였다.



소련 레니넷츠 급 잠수함  -1,123톤


비록 소련과 일본은 불안하지만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소련 대륙의 반대편 북해는 전황이 심각했다.
 
북해의 소련 항 무르만스크는 미영 서구진영에서 소련으로 보내는 모든 전쟁 물자가 유입되는 유일한 입구였다.
 
독일 해군은 미영의 보급 수송 선단을 차단하기 위해서 북해에 강한 해군력을 집중해서 선단과 호위 함대들을 공격했었다.
 
소련 해군은 블라디보스톡 해군기지 소속 잠수함 6척을 무르만스크로 이동 배치하기로 결정하고 이동 명령을 내렸다. 블라디보스톡 기지에는 L급과 S급 두 가지 잠수함이 배속되어 있었다. L급 잠수함 두 척을 먼저 보내기로 했었다.
 
이동 경로는 북태평양과 미 서해안을 거쳐 파나마 운하를 통과하고 대서양을 횡단해서 북해를 통해 무르만스크로 향하는 것이었다.
 
미국과 영국에 지원을 요청해서 이들로부터 긍정적인 대답을 확보한 소련은 1942년 9월 24일 먼저 L-15과 L-16을 출항시켰다.
 
L-15의 함장은 코마로프 대위, L-16의 함장은 블라디보스톡 잠수함대 최연장자인 구마로프 대위였다.
 
레니넷츠급인 L-16은 1,100톤으로 비교적 소형 잠수함이며, 이 레니넷츠급 잠수함 중 16번째로 건조된 잠수함이다.
 
두 함은 먼저 북쪽으로 방향을 잡아 항해를 계속, 알래스카 앞 알류산 열도의 더치 하버에 기항해서 미 해군으로부터 재급유와 재보급을 받고 10월 6일 다시 출항했다
 
다음 기항 예정지는 미국 서해안의 샌프란시스코였다. 출항한지 6일 후인 10월 11일, 잠수함 견시 당직 교대 시각인 오전 11시 15분, L-15의 함교에 있던 코마로프 함장과 신호병 스몰니코프는 전방에서 들려오는 두 개의 큰 폭음에 놀랐다.

폭음의 방향을 바라본 두 사람은 앞서 가던 동료함 L-16에서 터져 나오는 화염과 연기를 발견했다.
 
같은 순간에 L-15의 통신장교는 L-16으로부터 평문의 다급한 무선을 수신했다.
 
“우리는 ---”으로 시작한 전문은 위의 말만 남기고 중단되었다.
 
함교의 코마로프 함장은 L-16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을 목격하였다. 같이 함교에 있던 스몰니코프 수병은 다른 방향의 파도 사이로 수상한 잠망경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함장에게 보고했다.

코마로프는 잠수함의 포수들을 즉시 전투 배치하고 잠망경이 나타나면 포격하라고 명령했으나 잠망경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코마로프는 L-16함이 침몰한 전방 위치로 빠르게 이동해서 주변 해면을 살폈지만 아무런 생존자를발견할 수가 없었다. 코마로프는 자신들이 두 번째 표적이 될 위험성을 감지하고 비상 급속 잠항을 했다.
 
L-15는 그날 하루 종일 총원 전투 배치를하고 공격에 대비하며 위험 수역에서 빠져 나와야만 했다.
 
소련은 이 비극이 있었는데도 이어서 10월 6일 블라디보스톡을 출발한 4척의 S형 잠수함에게 그대로 항해를 계속하도록 명령했다.
 
네 척의 잠수함은 여러 어려움을 겪었지만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너 북해의 무르만스크에 도착하였다.



소련 S 급 잠수함- 840톤 , L급 보다 더 작고 구형이다.

 

L-16함의 격침 사고에 소련은 오랫동안 이것을 미 해군이 저지른 것으로 의심하였다고 한다.
 
L-15가 알류샨 열도의 더치 하버에 기항해서 그곳 미 해군 측과 앞으로의 항해 계획을 상의했을 때미 해군은 추가 파견 소련 S급 잠수함대의 출발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를 L-15 코마로프 함장에게  알려주지 않았었다.
- 미 해군에 복무하는 러시아 이민 출신 수병이 추가 파견 잠수함대가 출발했음을 코마로프 함장에게 귀뜸 해 주었다고 한다. -
 
당연히 소련 잠수함장에게 알려 주어야 할 정보를 감추고 있는 미 해군 측에 석연치 않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미 해군이 의심 받을 일은 또 있었다. 미 해군 장교는 소련 잠수함장에게 미 해안에 접근하면서 샌 프란시스코 미 해군 기지와는 항해 정보를 평문으로 교신하라는 지침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 것은 잠수함대의 위치를 공공연히 알려주는 것과도 같았다.
 
이 두 가지 이유로 전쟁이 끝나고 사실이 규명될 때까지 소련은 미 해군에 대한 의심의 눈길을 멈추지 않았었다.
 ※ 미 소 냉전시대 조작된 말같기도 하다. 격침된 L-16함에는 미 해군에서 파견한 러시아 이민자 출신의 미 해군장교 한명이 연락 장교겸 통역장교로 승함했었다.※
 
I-25 잠수함의 운항으로 경험을 얻은 일본 해군은 신형 수상기를 탑재한 대형함인 5,223톤 급의 I -400 시리즈 잠수함을 개발했다. 역시 제일 큰 목적은 파나마 운하 폭격이었다. 원래는 18척 건조 계획을 했지만 3척만 진수하였다. 



I-400시리즈 대형 잠수함 , 2차 세계대전에 출현한 잠수함중 최대 크기를 지녔다.


기술적으로 상당히 발전한 잠수함이었는데 종전 후 미국 해군은 이를 탐내는 소련의 손에 넘어 갈 것을 염려해서 한 척은 나가사키 앞 바다에서, 두 척은 하와이로 가져와 

모두 침몰시켰다.

 


I-400형 잠수함에 탑재했던 세이란 신형 정찰기

소련 해군은 이 신형 잠수함 대신 의문의 뇌격을 가한 잠수함이 미 해군이 아니라 일본 해군의 I-25라는 사실만을 얻게 되었을 뿐이었다.
 
후지다는 종전 후 고향인 이바라키 현에서 철물점을 하다가 한 전선 만드는 회사에서 입사해서 평범한 살길을 찾아 갔다.
 
1962년 그는 자신이 폭격했던 오레곤 주 브루킹 시의 주민들 초대로 현장을 방문하고 자기 집에 400년간 전해오던 일본도를 브루킹스 시에 기증하기도 했다.

출처: https://mnd-nara.tistory.com/64?category=332956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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